에티모틱 리서치 er4s 찬양론

몇 달 전에 에티모틱 리서치 mc5를 잃어버리고 포낙 pfe 111를 구매했다. 에티모틱 리서치와 함께 하이파이 이어폰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기업이라 궁금하기도 했고, 가장 좋은 제품 (er4s) 가격이 30만원에 육박하는 에티모틱 리서치의 양심less한 가격에 비해 착한 가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만큼 소리도 좋고 mc5와 비교도 안되게 착용감도 좋은 이어폰이었지만 뭔가 아쉬웠다. 에티모틱 리서치의 소리가 그리웠다. 왜 사람들이 에티모틱의 노예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친구와 청음매장에 놀러갔을 때 er4s를 오랜만에 들어봤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이걸 사야 한다.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이건 사야 한다. 집으로 돌아와 이성을 되찾은 나는 er4s를 당장 신품으로 사는건 한 달 과외비를 다 날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중고나라에 키워드 등록을 해놨다.

일주일 쯤 전 과외 가는 길이었다. 어느때와 같이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키워드 알림이 떴다. 14만원이었다. 눈을 의심했다. 글을 확인하니 진짜 14만원이었다. 2년 전에 만들어진 제품이고 팁이 몇 개 없긴 했지만 14만원은 의심스러웠다. 이어폰 14만원이면 비싼거 아닌가 싶기도 할테지만, 샀다가 다시 팔아도 18은 부를 수 있는 제품이었으므로, 무조건 이득이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하고 연락을 했다. 사기가 아닌가 의심스러웠는데 이 분이 동영상까지 찍어서 보내주길래 믿기로 했다. 사기면 신고하라고 자기 이름이 나오는 동영상까지 보내줬다. 설마 이렇게 정성스럽게 사기를 치진 않겠지.

택배가 도착하고, 오늘이 3일째다. 결과는 대만족. 귀는 고통받지만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참고로 er4s는 [그림 1]과 같이 드릴처럼 생겼다. 저걸 귓구멍에 가차없이 깊숙히 꽂아야 한다.) 포낙 pfe는 서랍 신세이다. 포낙 미안.

er4s 사진

er4s

er4s의 장점을 꼽으라면 첫째는 투명성, 둘째도 투명성, 셋째도 투명성. 소리가 정말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다. 소리들이 뭉치지 않고 하나하나 생생하게 귀에 내리 꽂아진다. 먹먹한 느낌이 전혀 없다. 모든 음역대가 균일하게 재생되며, 특정 음역대가 지나치게 많아서 나머지 음역대를 잡아먹는 것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몇몇 래퍼 이름이 붙은 브랜드 제품들이 그런 소리를 잘 들려준다.) 투명성과 해상력 면에서 er4s를 이기는 이어폰은 없을 듯 싶다. er4s 고유의 착용법 때문에 그러한 소리가 가능하다고 하니, 쓰레기같은 착용감정도는 눈감아 줘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저음과 타격감. ‘엥 그거 완전 깡통 소리 아니냐?’라는 소리가 종종 나오는 만큼 의아해 할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er4s는 처음부터 제대로 착용하기 힘들다. 드릴처럼 생긴 외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정도 넣으면 고막에 손상이 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폭력적으로 쑤셔 박아야 한다. mc5를 오래 꼈던 나이지만 아직도 적응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완전 깊숙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만 넣어도 제대로 된 저음은 나오지만, 처음에는 그마저도 힘들다. 다른 이어폰처럼 귀에 걸치고 들으니 이건 이어폰인지 깡통인지 저음도 하나도 없고 고음만 깨랑깨랑거리는데 뭐가 좋은 이어폰이라는건지 하면서 중고나라에 올리는 것이다.

제대로 착용한 er4s의 저음은 정말 좋다. 과장 안하고, 지금까지 들어봤던 이어폰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저음을 들려준다. 다른 이어폰에 비해 양은 적은 편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질은 끝내준다. 단단하게 귀 깊숙한 곳까지 때려박는 느낌은 어느 이어폰에서도 흉내낼 수 없을 듯 싶다. 드럼과 베이스 소리가 먹먹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고막을 타격한다. 대역폭도 좋아서 저음 깊숙한 곳까지 울려준다. 양이 적다고 했지만,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eq를 조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eq에서 저음만 좀 올려주면 다른 이어폰들 못지않게 양감도 있으면서 단단하고 타격감 있는 저음을 들려주는 이어폰이 된다. 속칭 ‘저음 괴물’이라고 불리는 이어폰들 또는 헤드폰들 중 일부는 종종 저음만 잔뜩 있을 뿐 소리가 단단하지 않고 먹먹하며 다른 소리들을 가려버린다. 그런 기기들의 저음이 둔탁한 나무 몽둥이로 완전비탄성충돌로 가격하는 느낌이라면, er4s는 날렵한 티타늄 막대기로 탄성있게 타격하는 느낌이다.

중음과 고음은 말할 것도 없다. 보컬의 목소리는 생생하고 고음은 깔끔하다. 다만 사람에 따라 고음이 거슬린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는데, eq에서 저음을 늘리고 고음을 조금 줄이면 해결된다.

뛰어난 차음성도 이 이어폰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어폰을 착용한 순간 바깥 세상과 내가 분리되어서 마치 별도의 감상실에 들어와 있는 느낌마저 준다. 내 발소리도 안들리고 차 소리도 안들리고 지하철 소리도 안들린다. 독특한 착용법 때문인 듯 싶다. 차음성은 양날의 검인데, 청각이라는 입력을 잃어버린 셈이니 지하철 역 못내리는건 일상이고 (역 알려주는 소리가 안들려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내리는 소리가 안들린다!) 자칫하면 로드킬당하기 십상이다. 때문에 시각을 두 배로 열고 다니고 항상 안전한 곳으로 다녀야 한다. 아니면 집에서만 듣든지.

찬양만 했으니 단점을 언급하면, 첫째도 착용감, 둘째도 착용감, 셋째도 착용감. 귀에 냅다 꽂는 느낌은 정말 불쾌하다. 끼고 있을 때에는 그나마 나은데, 뺄 때가 문제이다. 팁이 귓구멍 벽을 긁는데 그게 꽤 아프다. 생김새답게 빼는 것도 나사 빼듯이 돌리면서 빼야한다. 빨리 적응됐으면 좋겠다.

디자인도 쓰레기같다. 무슨 80년대 디자인같다. 귀에 꽂으면 귓구멍 밖으로 유닛이 튀어나오는데, 그게 꽤 거슬린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는 편이라 그냥 끼고 다니지만, 신경쓰이는건 사실. 디자인 신경쓴다면 er4s가 아니라 최근 기종인 mk5나 mc5를 사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사실 디자인 신경쓸꺼면 에티모틱껄 쓰면 안된다.)

터치노이즈는 심하다는 얘기가 많던데 나는 별로 못느꼈다. 같이 제공되는 클립을 옷에 끼우고 있으면 딱히 신경쓰이지 않는다. 줄 길이는 좀 지나치게 길긴 하다. 또, 별로 상관없을 것 같지만 은근히 중요한 사실이, 단자가 두꺼워서 케이스 끼운 핸드폰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이팟을 하나 장만할 생각이다. 이렇게 또 돈이..

암튼 디자인과 착용감과 같이 소리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완벽한 이어폰이라 생각한다. 근데 그게 워낙 개같아서 추천하기는 망설여진다. 착용감 따위 뛰어난 소리를 위해서라면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분들이라면 한 번 들어보기를 권유한다.

3 comments

  1. 앰프 물려서 들어 보세요 더도 덜도 말고 e12a 만 물려 들어도 팬티 10장은 필요 하실 겁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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